앞선 두 글에서 우리는 환원주의가 세상을 쪼개 이해하려는 사고방식이라면, 전체론은 관계 속에서 새로운 성질을 보려는 관점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전체론이 말하는 “부분의 합 이상”은 실제로 어떻게 나타날까? 그 구체적 현상이 바로 창발성(emergence)이다. 창발성은 개별 요소에는 없던 성질이 전체에서 새롭게 생겨나는 현상으로, 생명, 의식, 생태계, 사회 시스템 등 다양한 곳에서 발견된다. 이번 글에서는 창발성이 무엇이며, 왜 전체론의 핵심 개념으로 불리는지, 그리고 이것이 환원주의적 세계관에 어떤 도전을 던지는지를 살펴본다.
『이기적 유전자』를 넘어, 창발성으로 본 진화의 세계
요약
- 창발성은 개별 요소의 단순한 합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새로운 성질이 전체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 전체론은 이러한 창발성을 설명하는 관점으로, 환원주의의 한계를 보완한다.
- 물, 의식, 생명, 사회질서 등은 모두 창발적 성질의 대표적인 사례다.
- 『이기적 유전자』는 환원주의의 한계를 보여주며, 창발성의 필요성을 드러냈다.
- 현대 과학은 창발성을 수학적으로 탐구하는 복잡계 연구로 확장되고 있다.
- 창발성은 전체론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핵심 개념이다.
Part 1. 전체론과 창발성의 관계
전체론은 “전체는 단순한 부분의 합을 넘어선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어떻게 전체가 새로운 성질을 만들어내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바로 창발성(emergence)이다. 창발성은 복잡한 시스템에서 상호작용이 일어날 때, 그 구성요소로부터는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성질이나 행동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즉, 창발성은 전체론이 현실에서 구현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시
- 물 분자 하나하나는 ‘젖음’이라는 성질을 갖지 않지만, 수많은 분자가 모이면 젖음이라는 감각이 생긴다.
- 뉴런 하나는 의식을 갖지 않지만, 수십억 개의 뉴런이 연결되면 ‘생각’과 ‘감정’이 창발한다.
- 인간 개개인은 시장을 설계하지 않지만, 수많은 거래와 상호작용이 모여 ‘경제 시스템’이 형성된다.
이를 요약하면, 창발성은 전체론의 심장부다. 전체론이 “무엇을 보려는 관점”이라면, 창발성은 “그 관점이 실제로 드러나는 현상”이다.
Part 2. 과학 속 창발성의 사례
창발성은 추상적인 철학 개념이 아니라, 과학 곳곳에서 관찰되고 연구된다.
1) 물리학: 열역학적 창발성
온도, 압력, 점성 같은 성질은 개별 분자에는 없다.
그러나 수많은 분자의 운동이 통계적으로 결합되면 새로운 물리 법칙이 등장한다.
즉, 미시적 수준의 단순한 움직임이 거시적 질서를 만든다.
2) 생물학: 생명 현상
생명은 단백질, 효소, DNA 같은 물질의 조합이 아니다.
그 상호작용의 네트워크가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를 통해 생명을 탄생시킨다.
즉, 생명은 창발된 질서의 대표적 사례다.
3) 신경과학: 의식의 탄생
뇌의 뉴런은 전기적 신호를 주고받는 단순한 세포지만,
수십억 개가 연결되어 작동할 때 ‘의식’이라는 복잡한 상태가 생겨난다.
이 현상은 환원주의적으로는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4) 생태학: 생태계의 질서
각 생물은 생태계를 ‘만들려는 의도’가 없지만,
상호작용 속에서 먹이망과 에너지 흐름이 자발적으로 형성된다.
이 또한 창발적 패턴의 한 형태다.
즉, 창발성은 “전체론이 옳다는 증거”이자, 자연의 새로운 질서가 탄생하는 메커니즘이다.
Part 3. 환원주의와의 비교 — 창발성이 던지는 도전
환원주의는 오랫동안 과학 발전을 이끈 강력한 방법이었다. 모든 복잡한 현상은 더 단순한 구성 요소로 환원해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창발성은 이 전제에 도전한다. 즉, 부분의 법칙만으로는 전체의 성질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시 비교
- 환원주의적 시각: 뉴런의 활동을 이해하면 의식도 설명할 수 있다.
- 전체론적 시각: 뉴런의 집합적 연결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질서가 ‘의식’을 만든다.
『이기적 유전자』는 이런 충돌의 대표 사례다. 리처드 도킨스는 유전자를 진화의 기본 단위로 보고, 모든 생물학적 현상을 유전자의 이익으로 환원해 설명했다. 하지만 이후 학자들은 협동, 공생, 문화적 전이 같은 현상이 단순한 유전자 수준의 계산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그 결과 다수준 선택 이론(multilevel selection), 시스템 생물학, 생태적 진화 이론 등 전체론적 접근이 등장했다.
핵심 요약
- 환원주의는 “부품의 법칙”을 찾는다.
- 전체론과 창발성은 “관계의 법칙”을 탐구한다.
- 현대 과학은 두 시각의 균형 속에서 진화하고 있다.
Part 4. 복잡계 과학과 네트워크 — 창발성의 과학적 연구
과거에는 창발성을 철학적으로만 논의했지만, 오늘날에는 복잡계 과학(Complex Systems Science)을 통해 실험적·수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
복잡계 과학은 “단순한 규칙을 가진 개체들이 상호작용할 때 어떻게 복잡한 질서가 생기는가”를 탐구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핵심 개념이 바로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와 네트워크(network)다.
대표 사례
- 개미 군집: 개미 한 마리는 단순한 행동만 하지만, 집단은 놀라울 정도로 효율적인 이동 경로를 찾아낸다.
- 뉴런 네트워크: 신경세포 간 연결이 늘어나며 정보 처리 능력이 비선형적으로 증가한다.
- 인터넷과 SNS: 사용자 개개인은 규칙 없이 행동하지만, 전체 네트워크는 여론과 트렌드 같은 거시적 패턴을 만든다.
즉, 복잡계 과학은 이러한 창발적 질서를 모델링하고 시뮬레이션하며, “전체론을 수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시대”를 열었다.
따라서, 창발성은 더 이상 철학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으며, 그것은 자연과 사회의 복잡한 질서를 설명하는 현대 과학의 중심 주제다.
마무리
창발성은 전체론의 심장이다. 그것은 단순한 구성요소의 합이 아니라, 상호작용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질서다. 환원주의가 세상을 분해하며 원리를 찾았다면, 전체론과 창발성은 세상이 어떻게 스스로 질서를 만들어내는가를 탐구한다.
이제 과학은 두 관점을 함께 사용해야 한다. 부분의 법칙을 이해하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새로움을 포착하는 것 — 그것이 바로 현대 과학의 다음 단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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